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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훈련부 위탁 연구논문2) "교회와 디아코니아" (김현숙 목사)
2023-09-16 16:48:03
안성국
조회수   105

아래의 소논문은 이번 19회기 교육훈련부에서 각 지교회와 목회를 위해 익산노회 내 목사님께 위탁하여 진행한 연구물입니다. 

그 두번째 연구논문으로 김현숙 목사(푸른초장교회)님의 소논문을 올립니다. 
모쪼록 각 지교회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디아코니아

 

김현숙목사

푸른초장교회 담임목사

실천신학 디아코니아학 박사(Ph. D.)

한일장신대학교 객원교수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교회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나온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임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의 몸을 온전하게 이루어 가는 하나의 공동체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종말에 진정한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역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나며 구체화되어야 하는가? 먼저, 역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난 교회는 하나의 형태를 가진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교회는 그의 본질을 가진다. 이러한 본질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여짐으로 나타내져야만 하는 교회의 기초이며 근거이다.

 

. 교회의 본질로서 디아코니아

1. 교회의 본질로서 세 차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본질적으로 유기체적인 연관으로 사회성에 기초하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 가운데 신앙을 지나치게 개인주의화시키며 교회의 직무를 관료주의적 위계질서로서 왜곡시켜 가면서 신앙과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불일치를 이루는 상황들이 발견된다. 그래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회중들이 서로 섬기면서 교제하는 생명력 넘치는 살아 있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도르테 죌레(D. Solle)에 의하면 생명력 있는 교회는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그리고 코이노니아를 기본 요소로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 가지 본질 가운데 개신교는 말씀의 선포인 케리그마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교회에 생명력을 주는 다른 두 요소인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에 대하여 소훌히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교회는 자신을 기독교 신앙의 내적, 초월적인 면에 한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돈과 권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대 기업처럼 위계질서와 경쟁구도로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가져온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적인 기구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교회는 안주하여 자족하는 모습 대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방성 속에서 타자를 위한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체들의 연합으로서 하나의 공동체이다. 섬기시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동등하게 서로를 섬기면서 한 몸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만 한다. 이때에 교회는 그 중심에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와 그리고 케리그마를 동등하게 본질로서 담지 해야 한다.

 

1) 교회의 본질로서 케리그마 차원

케리그마란 복음 선포에 해당하는 말로써 선포의 행위, 즉 설교와 교리 지침을 포함한다. 말씀 선포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의 삶으로부터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선포된 말씀을 말로만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선포된 말씀이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하며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인의 삶을 추동해 내는 데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신앙인이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의 돌봄 행동과 나아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돌봄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교회의 본질로서 디아코니아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의미하는 말로써 교회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교회는 어려움과 역경에 처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든 사람들을 돕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디아코니아는 말씀 증언과 예전과 함께 삶의 외형화로 나타나야 한다. 교회의 말씀 선포는 말씀을 따라 사는 실천적인 삶으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디아코니아 없는 말씀선포와 증언은 열매 없는 공허한 말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디아코니아 없는 예전은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 의식 행위이거나 형식주의적인 경건성에 머물게 한다. 그와는 달리 예전과 선포되는 말씀이 없는 교회의 사회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의한 사회복지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봉사는 교회가 단지 사회적인 기능으로 축소될 위험성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복음의 능력을 정치적인 행동에 종속시킬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디아코니아 삶은 예전과 말씀 선포가 함께 하는 제단을 근거로 해야 한다. 교회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활동하는 곳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

 

3) 교회의 본질로서 코이노니아

코이노니아는 교제를 뜻하는 바, 하나님과의 교제와 우리 사이의 교제를 말한다. 교회는 찬양과 기도와 음악을 통한 축제로서 코이노니아를 경험하며 성만찬과 세례 등의 예식과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교제를 통해 일치를 향해가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는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인츠 디트리히 벤틀란트도 말하였듯이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예배(Leiturgia)와 증언(Martyria)과 섬김(Diakonia)3가지 본질은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 어느 활동도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이 세 가지 차원 가운데 그 어느 한편으로만 치중할때에 본질적으로 참다운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는 쉽지 않다. 즉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 없는 말을 늘어놓는 빈껍데기의 경건에 불과하며, 말씀 증언과 코이노니아가 없는 디아코니아는 일반적인 사회복지와 다를 바 없다. 또한 말씀 증언과 디아코니아 없는 코이노니아는 일반적인 사교모임이나 친교의 교제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표지로서 참다운 교회는 교회의 세 가지 본질이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구체화 될 때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의 봉사를 함에 있어서 말씀의 증언과 예전과 성례전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성과 같이 공동체적인 조화와 협동이 필요한 것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봉사, 찬양과 기도가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알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깊이 깨달아야 한다.

 

2. 봉사의 실존으로서 교회공동체와 그 지평

1) 하나님 나라 원리에 기초한 교회공동체의 삶

예수께서 그 당시에 그를 따를는 자들에게 선포한 복음은 섬김의 원리에 의한 공동체의 삶이었다.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도 섬김의 삶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유효한 것이다. 이는 교회공동체의 삶의 원리가 세상적인 도식과 아주 대립적인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거꾸로 된 세상이어야 한다. 디아코니아 신학자 파울 필리피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진정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될 때에 타자를 위한 섬기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사회 속에서 공동체의 삶을 본보기로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참다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새로운 구조는 섬김의 원리에 의한 틀이어야 한다. 이러한 섬김의 원리는 지배하고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섬기는 준비성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섬김의 원리는 우리에게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줄 수 있다. 자기를 비워 스스로 낮아짐에 의한 섬김만이 적자생존의 경쟁 논리에 의한 삶의 수직적 구조를 극복하고 수평적 관계를 이룩하면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섬김의 원리에 의한 수평적 구조를 만인 섬김직으로 일컬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디아코니아 활동을 위한 구조는 그동안 만인 사제직에 바탕을 둔 교회 구조에서 이제는 의미적으로 만인 섬김직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교회의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섬김의 삶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하는 공동체의 연대적인 사역이다. 교회는 이러한 구조 전환을 통하여 섬김 속에서 자기 비움을 통한 화해와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고 있는 미래사회를 위한 새로운 사회구조의 틀로서 자리해야 할 것이다.

 

2) 교회공동체의 디아코니아 실존

교회공동체의 봉사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셨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세상 속에 있는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웃을 돌보도록 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 신학자 울리히 바흐(U. Bach)는 섬기는 교회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용서의 경험이 인간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항상 하나님에 대한 숙고가 그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 교회는 용서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용서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용서하는 훈련을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서 화해의 길을 갈 수 있다.

 

3) 세상 속에서 모델로서 교회공동체의 삶

터툴리안은 교회공동체를 서로 섬기는 공동체로 이해하였고, 모든 신앙인들은 이방인들이 기독교 신앙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를 보아라! 먼저 감탄하도록 예수의 근본 질서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서신들과 설교들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선행을 강조하면서 그 자신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으며, 교회가 항상 가난한 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칼빈은 말씀과 기도가 없고 성만찬의 나눔이 없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사랑의 활동이 없는 교회는 참다운 교회가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봉사는 겸손히 할 때만이 도움을 받는 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섬김의 본질이요 이로부터 나오는 섬김의 삶이 세상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겨 인간을 섬기고, 인간을 섬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가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교회는 이 땅에서 고통, 비방, 박해 속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세상의 악의 권력과 대항함으로 고통도 당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고, 예수가 그의 사역과 십자가의 길 속에서 몸소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의 섬김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도 아니며 또한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서로 주고받는 섬김이다.

 

. 예수님의 디아코니아

1. 예수님의 질병 치유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갖는 강조점

1) 구약성서의 진술에 따르면 질병은 하나님의 저주로서 이해되었다. 특히 문둥병과 같은 병의 증상에 대하여 구약성서의 레위기 13-14장의 정결법과 연관시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유대 랍비 신학에서 문둥병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저주로 이해되었고, 그 병에 대한 치료는 하나님의 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종교-사회적 환경 속에서 병든 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엄청난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고통까지 짊어지고 종교와 사회로부터 격리 또는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질병에 대해서 반드시 죄에 의한 하나님의 벌로 규정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장애인에게 그 자신의 죄가 아니며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시면서 그를 고쳐주셨다(9:3). 여기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활동이며, 이는 기존의 종교-사회적인 관습과 선입견과 편견을 없애고 사랑을 가지고 병든 자와 쟁애를 가진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병 치유는 질병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관과 종교 의식적인 관점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성 속에서 상대화되고 있으며, 이는 종교-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로서 이들이 하나님 나라로 모이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치유와 관련하는 귀신 축출에 대하여 유대적인 비난이 있었는데 예수는 귀신에 사로잡혀 축귀를 행하는 자라고 하였다(3:22; 11:15). 이러한 비난은 유대적인 전승 입장에서 예수가 귀신의 힘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전승인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입장은 예수님의 축귀가 특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에서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이적의 징표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치유는 하나님 나라가 유대적인 규정에 의해 배타 당했던 자들을 위해 열려진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선포되는 곳에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이 쫓겨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마귀 세력을 쫓아내도록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4) 부활 이후의 교회들은 그들이 병을 고쳐줄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현재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기초한 것이다(7:22; 3:16; 19:13).

 

5) 초기 교회공동체에서는 회중들 가운데 병 고치는 자를 은사의 목록에 기록하고 있으며(고전 12:8-10), 이러한 일이 장로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5:14f).

 

6) 병의 치유는 근본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하나의 본질적인 표지로 기술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병자 치유에 대한 봉사가 초기 기독교공동체에게 디아코니아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공동체는 성령강림을 경험하였다. 그 가운데 말씀과 봉사가 있었으며, 그 봉사는 병자들을 고쳐줌과 식사 공동체였다.

 

2) 죄인들과 식탁 공동체

예수님은 항상 돕는 자로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마주 나아갔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죄인들과 만나는 것에 대한 진술들은 이미 용서의 집행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죄의 용서가 집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과 만남 속에서 이미 죄의 용서가 실제로 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죄의 용서는 병자가 건강해졌으며, 전에는 걸을 수 없었던 자가 침상을 들고 움직일 수 있었으며(2:12), 죄 많은 여인이 용서를 받은 것이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전권의 힘을 가진 예수님은 이미 죄인들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역시 그가 형제들의 형제로서 연대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필요로 하 죄인들의 상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죄인들에게 열려지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들과 세리들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지나친 열심을 가진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낙인찍힌 자들로서 식사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다. 예수가 죄인들을 찾아가서 돌보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수 당시에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규범적인 유대교에서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 바울에게 나타난 기독교 봉사

바울은 선물로 주어진 은혜의 구원과 다시금 그 은혜를 향하는 선행봉사의 관계를 직설법과 명령법의 연관 속에서 규명하도록 하였다. , 신앙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구원과 칭의를 얻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날마다 구원을 이루는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바울의 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의 몸사상에 기초하는 사회성과 연대성에 있다. 바울에 있어서 봉사, 은 은혜의 선물이며, 은사의 활용과 병행적인 표현이기도 한다. 그는 말씀 선포와 치유와 방언을 넘어서 고린도전서 1228절에 기록된 모든 은혜에 선물을 동시에 봉사의 사역으로 말하며,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봉사해야만 한다. 바울은 그의 고유한 사도적인 의무를 역시 봉사로 이해하고 있다(고후 3:3-6;4:1;11:8;11:13). 바울의 거룩한 자들을 돌보는 봉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자의 실존은 그의 고난의 활동으로 표현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7-34절에서 주님의 만찬을 가난한 자들을 배부르게 하는 식사와 연결시킨다. 바울은 로마서 161절 이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디아코니아 섬김으로 그와 동역한 자들임을 열거하엿다(16:1-23). 바울은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공동체로서 모든 신앙인 구성원들이 서로 돌보면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삶에 이르도록 하였다.

신약성서에서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돌봄을 위한 바울의 모금이 디아코니아의 패러다임으로 이해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선포를 위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부활의 증언들로부터 그의 사도적 권위를 확인받고 이방 헬라세계로 갈 때, 그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위임 사항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가난한 자들이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2:10). ,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은 가난한 자로 총칭되는 물질적, 정신적, 영적으로 고통당하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것을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적 선명성을 봉사로서 특징지을 수 있다(11:13). 바울이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서 사도직을 감당하는 가운데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모금은(11:29-30) “봉사였고, 이것은 그의 사도직의 권위와 진정성을 확인시켜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서로를 돌보는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워가는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어내는 활동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바울적인 교회공동체들의 디아코니아 활동은 보다 후기에 교회들 간에 돌봄을 위한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의 기원이 되었다.

 

. 교회의 직제로서의 디아코니아

1. 예수제자단

오늘날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위상이 약화 된 시기에 우리가 교회의 본질인 디아코니아를 수행하므로써 교회의 위상 회복을 이루고자 할 때, 교회의 디아코니아 수행과 관련되는 직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부터 디아코니아 직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 제자단에서 출발하여 디아코니아 직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제자단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불러모은 사람들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다.

이러한 예수 제자단은 당시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는 두 종류의 그룹이었다. 첫째 그룹은 좁은 범위의 예수 제자단으로 직업과 가족을 버리고 떠나 예수께 나온 12명을 비롯한 70인의 숫자로 제한적이다. 이 제자단은 예수의 부르심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 그룹은 강력하고도 강권적인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선택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품으로 모으는 마지막 때를 위해서 사명을 받은 무리들이다. 이러한 예수의 제자단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형성되었다. 둘째, 그들은 예수와 연합되었고 동시에 서로 형제라는 공동체로 결합되었다(23:8b). 그리고 이 제자단은 예수님과 공동 운명체로 함께 하였다. 이들은 고향과 가족을 떠나온 것(8:20; 9:58) 뿐만 아니라 예수와 함께 박해나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14:27; 10:38<Q>)과 같은 고통과 위험에 처해지는 것 까지도 각오해야 하였다. 셋째, 이 제자들은 서로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성장하는 것이었다. 넷째, 이들 예수 제자공동체는 세상의 삶의 원리와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다. 이 세상은 권력 중심의 구조이면서 힘이 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다스리는 구조이지만 예수님이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그와는 반대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10:42-44)이다. 이러한 예수 제자단의 사회구조적인 특징을 대조사회’(Kontrasgesellschaft)로 표현할 수 있다. 나아가 두 번째 그룹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을 위해 자신의 직업과 가족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의하는 자들로서 넓은 범위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여동생들(11:1)과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예수를 도왔던 여러 여성들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예수 제자단의 사회구조적 특징과는 달리, 우리는 세속 사회 속에서 직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아르케”(arche) 단어는 직제를 표시한다. 이 단어는 국가 관청이라는 의미로, 로마의 국가 권력자의 직함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직제의 의미는 세속의 힘과 권력 중심의 가치관을 담보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신약성서 안에서 예수 제자단에게는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 제자단은 세상의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것과는 다르게 섬기는자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시의 제자단은 예수님의 강권적 부르심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안에 불러 모으는 중요하고도 매우 특별한 사명을 받은 무리들이었다. 그리고 예수제자단에 속하는 자들은 예수에 의해 세상의 행동 원리와는 철저하게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인 사랑과 섬김의 행동 방식을 교육 받았다. 그래서 이 예수 제자단은 세상의 삶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속했던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꺼꾸로된 삶의 방식이었다. 이렇듯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인 복음 선포와 치유의 사역을 함께 경험했고,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다. 여기서 예수 제자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속에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는 자들로 말씀 선포와 행동의 디아코니아가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아직은 직제가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인 상태였다.

 

2. 사도와 집사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대한 약속을 기다리던 무리들을 통해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에서는 다양한 직분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 우리가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교회 초기의 직제는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교사로 불리는 비 제도화된 직분들이었다. 그중에서 사도는 교회의 첫 공식직함이었다. 이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고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주님의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설교와 교육, 치유 등의 디아코니아 사역을 하며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사도성을 계속 의심받으면서도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증언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였다(1:1). 그리고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였다. , 바울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에서 직분을 교회를 세우는 은사로 이해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7-28, 개역개정)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집사직무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초기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의 말씀의 봉사와 분리되어 식탁 봉사로서 집사직무가 시작된다. 이러한 사도의 직무와 집사직무에 대해서는 후기 바울 서신인 60년경 빌립보 서신의 인사말에서 빌립보에 사는 형제자매들 가운데 감독들(έπίσκοποι)과 집사들(διάκονοι)이 나타난다. 이 때에 한 감독과 여러 집사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딤전 3:2, 8), 감독과 집사직무는 전문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였으며(딤전 3:1), 그 직무를 수행할 때 그에 상응하는 급여를 받았다(딤전 5:17-18). 여기서 특이할만한 것은 남성 집사들로 표현된 복수형 디아코노이”(δικονοι)의 단어 안에는 여성 집사들이란 뜻이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딤전 3:8-13). 이와 관련해서 위르겐 롤로프(Jürgen Roloff)는 디모데전서 311절을 여성 집사직에 대한 자격 지침으로 보았다. 그는 11절이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충성되이 행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동일한 기준으로 요구하는 것으로서 여성집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집사직은 예수 전승(22:27)에 기초한 예수의 디아코니아를 실천하는 식탁에서 시중드는 봉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사직(διάκονος)의 용어 사용이 예수의 섬김에서 도출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 집사직에 대한 용어 사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신학적 주제인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중심적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감독과 집사직무의 직분 수행을 위해서는 일상적인 삶에서 시민적인 덕목을 요구받는다(딤전 3:2-13; 1:7-9).

이렇듯 초기 교회공동체의 직제와 관련된 상황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적 말씀의 직무와 함께 디아코니아를 전담하는 집사직은 7명을 안수하여 세웠고, 그 후 목회 서신에서는 가난한자들을 돌보는 직무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빌립보서 11절을 통해 초기 교회공동체들이 감독과 집사의 직제를 가졌던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2세기 초반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빌립보서 11절에 등장하는 감독과 집사의 도식에서 하늘의 영적인 세 개의 별이라고 하는 감독과 집사와 장로의 세 가지 직무를 발전시켰다. , 감독은 하나님을, 집사는 예수그리스도를, 그리고 장로들은 사도들의 모임을 모사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사도와 집사직무에 대해서 신약성서 이후의 사도적인 교부들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사도 이후의 시대에 디다케로부터 교회공동체들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부양하는 일들을 위해 법령제정과 기구화되었는지에 대한 증거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디다케에서 특별히 외인 접대(11-12)가 상세히 다뤄지고 있으며, 이러한 일을 전담하는 집사들이 발견된다. 이는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들이 외인접대의 영역에서 많은 일들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디다케교회공동체 안에는 교회의 지도력으로서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집사들의 주요 직무는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함께 말씀선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교회에서 집사들은 교회의 지도력으로 위치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과 재산을 관리하고 세례 지원자를 교육하는 것과 함께 예배 시 성만찬의 분병과 분잔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고대교회 안에서 교회의 집사직무는 특별한 기구로서 사랑의 돌봄 활동에 집중하며, 이 특별한 직무를 맡은 집사들은 그들의 공동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이미 이그나타우스에게서 보였듯이, 고대교회의 감독과 집사는 아주 밀접한 관계로서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처럼 나타났다. 이렇게 교회공동체 안에서 가난한자들을 돌보는 집사직무가 거의 500년 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바르네트(J. M. Barnett)는 주후 100-600년 동안에 교회의 집사직무가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세기 콘스탄틴 시대 이후 전환기에서 서방교회에서는 수직 위계질서의 지배 원리 속에서 디아코니아를 전담한 집사직무가 점점 위축되고 사제직에 의해 흡수되는 양상으로 흘러갔으며,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집사직무가 소멸된 요인을 살펴보자면 그 하나는 서방교회가 국가적인 후견을 받으면서 디아코니아 시설을 확장하는 것에 재정지원을 받게 된 것에 놓여있다. , 교회는 재정의 주도권을 가진 국가에 점점 더 의존해 갔고, 국가의 세속화된 명예의 경주이념에 지배당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지위가 높아지려는 경향이 우세해졌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역이 점점 더 감독직무에 집중되었고, 디아코니아를 전담했던 집사직무는 고유한 사역을 잃어가게 된 것이다.

종합적으로 요약하면, 오늘날에는 교회의 직제가 다양한 모습이지만 사도적직무와 집사직무가 초기 교회공동체로부터 고대교회 때까지 동등한 위치 속에서 교회를 위한 봉사적인 직무로서 수행되었다. 그러나 4세기 콘스탄틴 이후 사제 일방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더이상 집사로 일하려 하지 않으며 집사직무가 쇠퇴하게 되었고, 점점 감독 아래 위치하다가 중세시대에는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본래적인 의미로서 교회의 종신직인 집사직무의 소멸과 함께 교회는 수직적인 위계질서의 지배하고 군림하는 구조를 강화시켰고, 그래서 교회는 점점 섬기는 예수 제자공동체를 잃어버리고 타락한 인간의 세속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조직기구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예수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말씀직무와 이웃을 구제하고 섬기는 집사직무가 회복되고 동등한 파트너로 협력할 때 진정한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의 섬기는 지도력으로서 집사직무가 내용적으로 교회 안팎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와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본래적인 직무의미와 역할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V. 결론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하나님이 불러내어 모으신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만약 교회가 세상적 가치관으로 간다면 그 교회는 주님의 몸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교회가 가야 할 길에서 이탈한 것이다. 즉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신 것처럼 교회도 예수 제자 공동체로서 섬기는 존재이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인데, 교회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란 올바르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만찬의 교제가 있으며,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향해 디아코니아를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서 디아코니아를 수행할 때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란 쉽지 않다. 교회의 디아코니아는 하나님 예배 속에서 얻어지는 영성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자신의 것을 세상을 향해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는 디아코니아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증언하며, 세상에 희망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로써 진정한 예수 제자 공동체를 회복하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게하르트 쉐퍼.테오도어 슈트롬/한국디아코니아신학회 역, 디아코니아와 성서, 서울: 한들출판사,2013.

김옥순, 디아코니아 교회론, 전주: 한일장신대출판사, 2018.

김옥순, 디아코니아 입문, 서울:한들출판사, 2010.

김현숙, “개신교 전통 속에서 디아코니아 교회론에 관한 연구” - 한국 개신교회의 디아코니아 정체성 정립을 위하여-, 박사학위논문, 한일장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20.

에른스트 트뢸취/ 현영학 역, 기독교사회윤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3.

한스 큉/ 정지련 역, 교회,서울: 한들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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